전라도

강진 다산 박물관

비사랑 2022. 3. 28. 09:04

2022년 3월 27일 

다산과 그의 학문을 좀 더 깊이 알고자 한다면 정말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산박물관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다산이 걸어온 길과 강진에서의 삶과 학문, 인간적이고 백성을 사랑했던 마음이 곳곳에 스며있어 관람하는 동안 다산 선생님께 푹 빠진? 기분이었다.

 

다산박물관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 강진에 남겨진 흔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조선 후기 개혁·개방의 학문을 실천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된 다산박물관은 강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자 문화시설이다.

 

 

 

 

  • 입장 시간 : 09:00~17:30, 관람 시간 : 09:00~18:00
  • 휴관 : 매주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 입장료  

 

주차장, 이 곳 말고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 더 넓은 공간이 있다. 

 

 

박물관 안내도

 

 

 

돌담

 

 

 

 인공연못이지만 맑고 시원함이 가득하다..

 

 

 

 

 

만남(相逢)

건물내부로 들어와서 입장료를 낸다.

 

 

 

다산박물관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실학자 정약용과 18제자 상징조형물이 전시되어있으며, 조형물 천장에는 별자리가 나타나 있다.

 

 

 

 

생애(生涯)

다산정약용선생과 성호학파의 관련 사실들을 서책모형의 내부영상으로 표현하여 천주교와 실학, 이익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다산의 모습들의 정보를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교리를 접하고 천주교 서적을 보며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었던 다산

 

 

 

다산선생이 10일간 해미로 유배를 가게 된 계기와 돌아오는 길에서 사도세자 유적에 관심을 보였던 내용, 해미 유배 전에 올렸던 상소3개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모습. 얼마전 다녀와서인지 건축물 하나하나 친숙한 느낌이 든다.

 

 

 

 

정조는 붕당 싸움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왕위에 올라 조선의 개혁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왕이다. 물론 혼자서만 한 일은 아 니고 정조의 곁에는 뜻을 함께했던 정약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규장각을 만들어 인재를 키우고, 붕당 싸움을 없애려는 탕평책을 펴고, 수원 화성에 조선 개혁이라는 큰 꿈으로 뜻을 함께한 군신의 합작품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조와 정약용은 뜻을 꺾지 않고 조선의 변화를 이끌었다. 정조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개혁과 실학의 역사가 더 쓰여지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유배지에서 저술되었던 다산의 방대한 저서들이 전시되어있다. 특히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관련 내용들을 조형물로 구성되어 있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1801년 11월 22일경 강진 도착. 강진의 유배생활. 유배초기 노파의 주막집을 '동문매반가'라 일컫다가 '사의재'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하는 정약용의 모습 등 )의 거처를 소개하는 코너로 구성되어 있다.

 

 

 

유배중 다산의 거처 모형

 

 

 

 

 

 

다산과 관련된 장소들과 글귀들을 천정에 배치해 나름 시각적인 멋스러움을 더했다.

 

 

 

 

 

 

매화병제도(梅花屏題圖)

이 그림은 부인이 보내온 치마에 그린 것으로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선물로 보낸그림이다.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이 그림에 스며들어 있다. 귀향살이에 시집가는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다산초당의 사계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백련사(다산초당과 800여m 거리)를 품고 있는 만덕산은 야생차가 온 산을 덮고 있어 ‘다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의 ‘다산(茶山)’은 바로 그 만덕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다산초당 4대 비경 중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썼던 다조(茶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차를 즐겨했음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 성역

화성 축조에 쓰였던 거중기

화성의 둘레는 5천520m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 등 4개의 문을 비롯하여 암문, 수문, 적대, 공심돈, 봉돈, 포루, 장대, 각루, 포사 등 각종 방어시설까지 구비한 성이며 아름답고 견고한 예술작품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정말 정조의 위대함과 다산의 탁월한 능력은 시대와 역사를 바꿨다고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1. 초당을 가꾸다.

1808년 다산으로 옮겨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화목을 줄지어 심고 물을 끌여들여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암과 동암 두 암자를 수리해 1천여권이나 장서하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2. 초당에서 살아가다.

 부유한 자라고 어찌 우러러볼 것이며 가난한 자라고 어찌 슬퍼할 것이랴!

 

 

 

3. 초당에서 이루다.

제자들과 함께 학문적 성취를 이루다. 

 

 

다산은 유배기간동안 연구와 저술 활동, 그리고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그때 쓴 책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이다.  

 

 

 

 

4. 함께 잇다.

많은 이들의 뜻과 정성이 모여 다산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피첩(霞帔帖)

1810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정약용에게 부인 홍씨(洪氏)가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紅裙) 한 벌을 보냈다. 시집올때 입었던 치마로 오랜세월탓에 색이바래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정약용이 귀양을 떠난 지 십 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정약용은 부인이 보낸 빛바랜 치마를 마름질해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네 첩의 서첩을 만들어 보냈다.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세 첩으로 첩의 순서는 알 수 없다. 그 내용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등 아들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내용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서적이라 한다. 

 

 

 

 다산의 삶과 학문, 업적들이 일목요연하게 구성, 전시되어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

 

 

 

휴게실. 책과 음수대가 있고 전망도 좋아 잠시 쉬기 좋은 공간이다.

 

 

 

다산박물관 전경

 

 

계단을 올라가면 너른 잔디가 펼쳐진 다조 마당이 나온다.

 

 

  의자와 넓은 잔디밭은 쉬거나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다.

 

 

 

박물관 1층 지붕인 셈이다..^^

 

 

 

위에서 바라본 앞마당

 

 

 

공원 산책로

 

 

 

말씀의 숲

말씀의 숲 안내도

 

 

안내도 뒷면의 다산 4경 (다산초당에서의 설명과 2, 3번이 바뀌어 있다..)

다산 4경: 1-정석 (丁石), 2- 다조(茶竈), 3-약천(藥泉), 4-석가산(石假山)

 

 

다산 동상

 

 

말씀의 숲은 정약용 선생의 명언을 각계각층 사람들의 다양한 육필로 돌기둥에 새겨 조형화한 야외공간이다.

 

 

 

글귀를 읽으며 걸을 수 있는 길

 

 

 

 

 

 

 

 

첫번째 방문때에는 짧은 시간 그냥 휙 돌아보았던 곳이다. 오늘은 이 곳에서 다산의 흔적과 유물들을 통해 그 분의 삶을 한층 이해하고 학문의 깊이, 백성을 사랑한 마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다산 선생님과 가까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