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다산과 혜장스님이 걸었던 오솔길을 걷는 오늘의 여정..
이 길은
다산초당에서 800m 떨어진 백련사의 당시 주지 혜장 스님을 찾아 차와 세상을 이야기하고 또한 혜장 스님이 동백나무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을 찾으면 역시 차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다산과 혜장이 오고 갔던 그 오솔길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백련사는
서기 801년 창건 당시 이름이 ‘만덕사(萬德寺)'였던 이곳이 ‘백련사(白蓮社)’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회종 7년 원묘국사가 시작한 ‘백련결사’에서 유래한다. 그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불국정토’가 아닌 ‘정토’를 건설하자고 외쳤다. 그것을 계기로 백련사는 절 사(寺)자가 아닌 ‘모일 사(社)’를 사용하는 도량이 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불교에 귀의하고 입산한 사찰이라고 한다.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수륙재를 지내기도 했다.
백련사에 도착.. 입장료, 주차료는 없다.
주차장과 화장실,관광안내소가 있다.
白蓮社 였는데 寺로 바뀐? 현판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양옆으로 동백 숲길 시작이다.
동백꽃은 꽃이 질 때,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고 꽃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 특징으로 나무에서 한 번, 떨어져서 또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길 왼편의 작은 연못
해탈문
150년이 넘은 배롱나무
만경루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대웅전. 조선 3대 명필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만경루 편액과 안쪽 천정
만경루 창으로 보는 풍경
경내에서 만난 천리향과 노란 민들레, 봄이구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가는 길은 아름다운 숲길 장려상을 수상하였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오직 동백나무들만이 빼곡히 숲을 이루었다.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백나무
오랜세월을 견디며 울퉁불퉁한 모습이지만 굳건히 꽃을 피우는 나무들
차 밭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길
동백숲과 차 밭
정약용이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한 것은 순전히 만덕산 때문이다. 백련사를 품고있는 만덕산은 동백뿐 아니라 야생 비자나무 차나무 등이 많이 있는데, 특히 야생차가 온 산을 덮고 있어 ‘다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의 ‘다산(茶山)’은 바로 그 만덕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당에서 800m 떨어진 백련사의 당시 주지 혜장 스님을 찾아 차와 세상을 이야기하고 또한 혜장 스님이 동백나무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을 찾으면 역시 차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다산과 혜장이 오고 갔던 그 오솔길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제 막 올라오는 연초록의 연한 잎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백련사. 고개를 넘어오며 한 눈에 보이는 절의 모습에 반가웠을 다산정약용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정돈된 길이라 오르막이지만 그리 힘들지 않다.
해월루 갈림길, 0.1km라 들리기로 한다.
해월루
길에 접어들자마자 바로 보이는 해월루
해월루에 올라서면 강진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혜장 스님도 다산도 이 곳에서 함께 이 풍경을 봤을까?
(물론 그때 이 정자는 없었지만..)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
견월첩(見月帖) 혜장과 다산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중에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과 야생차들이 반기는 길
길 왼쪽 휘어서 자란 삼나무 두 그루
이 길에도 야생차들이 눈에 띈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대나무 울타리가 인상적인 길
천일각(天一閣)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이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이 세웠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000여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 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초당
강진포구 일대에서 지역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지내던 다산은 호남의 명문가이자 외가인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 그리고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그때 쓴 책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유배 생활 나머지 기간인 10년간 불후의 저작물을 남기며 ‘다산학의 산실’로 거듭났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였는데 193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바로 ‘해남 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만들어 1958년에 한옥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원래 윤씨 산정(별서)으로 사용되던 누옥을 선물받은 다산은 이곳에 동암과 서암이라는 서재 겸 학교를 만들어 손님을 맞고 학생을 가르쳤으며 만덕산 찻잎을 따다 말리고 잘라 초당 뒤에 스스로 파서 만든 옹달샘 ‘약천’ 물을 끓여 차를 내기도 했다.
다산초당 제1경 :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보여준다.
다산초당 제 2경: 약천(藥泉)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처음에는 물이 촉촉히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히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산초당 제 3경: 다조(茶竈)
다산이 이곳에 오기전부터 있었다는 이 돌은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 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산초당 제4경: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산초당의 고즈넉함을 더해주는 연지석가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귀히 여겼고,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반대편 만덕리에서 다산초당 올라오는 길
다시 백련사로 향한다.
이 길은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혜장 스님은 39살의 이른나이에 입적했다. 다산은 몹시 슬퍼했다. 가슴이 아파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다산은 ‘아암(兒巖) 장공(藏公)의 탑명(塔銘)’을 써서 스님을, 벗을, 도반을 기렸다. 이 글에 스님을 처음 만나 『주역』을 논하던 광경을 선명하게 글로 썼다.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가 상큼한 길에서 잠시 쉬어 본다.
동백이 아름다운 백련사
오늘의 길: 강진 백련사 주차장→ 백련사→ 백련사 동백숲→ 해월루→ 다산초당
거리 : 왕복 약 2km, 시간 : 왕복 1시간 40분 (휴식, 사진촬영 포함)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와 본적은 있지만 이 길은 오늘이 처음이다. 다산과 혜장스님의 우정의 길이며 다산의 유배기간동안 서로의 학문과 마음을 나누었을 두 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분들의 숨결을 느끼며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였다. 삶에서 누군가 그리워진다면 이 길을 추천한다.
돌아가는 길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에 들렀다.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사의재(四宜齋)
이 곳은 다산이 유배되어 처음 4년을 머물렀던 주막이다. 유배 온 죄인을 받아주는 곳 없어, 동구 밖 주막에서 모녀의 배려로 임시 머물렀던 이 곳을 다산은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했다. 사의재는 ‘마땅히 네 가지를 지켜야 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의미한다.
사의재 내에 있는 동문주막 벽에 붙은 글
다산실학의 4대 성지: 사의재, 보은산방,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
사의재는 2007년 강진군에서 강진읍 동성리 옛터에 복원해, 현재는 객실 9곳을 갖춘 한옥체험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예약을 통해 일반인도 머무를 수 있다.
동문샘(東門井 )
강진읍이 와우형국이고 동문마을에는 소의 왼쪽 눈을 뜻하는 샘이 있다. 강진읍성 사대문(四大門)의 하나인 동문(東門)이 있어 마을 지명을 동문안(東門內)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동문샘(東門井)은 마을안에 있는 샘이다.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남도답사 일번지)에서 첫번째 답사처로 유배의 땅 강진,해남 일대를 꼽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한 자락 이야기가 있는 백련사와 다산초당길은 힐링 그자체였다. 언제든 와도 오늘의 평안함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도움이 되셨다면 ♥ 꾸욱~ ^^; 감사합니다~
'전라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진 영랑 생가 (0) | 2022.03.28 |
---|---|
강진 다산 박물관 (0) | 2022.03.28 |
광양 매화마을, 청매실 농원에서 매화 향에 취하다. (0) | 2022.03.21 |
전남도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순회전), 광양예술창고 (0) | 2022.03.10 |
순천만 습지- 순천만 갈대밭의 가을 (0) | 2021.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