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1일. 맑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과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순례에 등장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부석사를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다. 원낙 먼 거리라 이번 소백산 등산길에 들려보기로 했다. 왜 이제야 보게 되었는지 아쉬움도 있지만 정말 아름다운 산사로 꼽히는 이 곳의 시간은 천년을 거슬러 신비로움과 우아한 매력 그 자체였다.
부석사(浮石寺)는 태백산(太白山) 봉황산(鳳凰山)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이다.
주차장에서 부석사 가는 길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전체 길이가 143km(360리)에 이르는 소백산 자락길은 모두 열 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이다. 영주 부석사는 11자락 시작점이다.
부석사는 경상 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 대사가 세웠다. 고려 시대에는 절의 이름을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고 하였는데, 정종 때 원융 국사가 이 절에 머무르면서 절을 크게 고쳐 지었다. 또, 공민왕 때인 1372년에는 원응 국사가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낡은 건물을 고치고 그 밖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후, 조선 선조 때인 1580년에 사명당이 다시 한번 고쳐 지었고, 영조 때인 1746년에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에 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 안내도
부석사 관람요금
성인: 2,000원, 청소년: 1500원, 초등학생: 1,000원 (단체는 요근에서 200원 할인)
부석사 일주문
봉황산은 태백산의 마지막 종착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가지와 줄기를 통해 뻗어 온 정기가 모인 장소가 부석사 자리이기 때문에 태백산 부석사라 쓴 것 같다.
부석사에 오르는 은행나무길. 가을이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부석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절에 법회나 기도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란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긱대를 당간(幢竿)이라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라 길 옆으로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을 두었다.
천왕문(天王門)
회전문
엄청난 석축위에 자리한 회전문이다.
회전문 밖으로 보이는 범종루
회전문 오른쪽은 약간의 공간을 두고 지어진 관광안내소 건물이다.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탑이다. 두 개의 탑은 처음부터 함께 만든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원래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높이 5.26m, 기단너비 3.56m이다.
범종루(梵鐘樓)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 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 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석축(石築)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으로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코로나 때문인지 물을 떠 마실수 있는 바가지는 치워져 있다.
산비탈에 돌을 쌓아 높게 만들어진 부석사는 아래를 내려다 보는 뷰가 멋진 곳이다.
부석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주문부터 범종루까지, 그리고 안양루와 무량수전까지의 두 부분이다. 안양루의 안양은 서방 극락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안양루는 두 세계를 구분 짓는 관문이 된다. 부석사 터를 흔히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라 한다. 부석사의 발치의 낮은 산들인 안산(案山)은 바로 봉황의 알에 해당된다.
안양루(安養樓)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 은 ‘ 안양문 ’ 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 안양루 ’ 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 안양 ’ 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누각이면서 문인 안양루, 아랫부분 편액은 안양문으로 되어 있다.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안양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을 만난다.
위층 마당 쪽(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루’ 라고 씌어 있는 편액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이는 소백산 능선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9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으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처음 지었고 1376년 고려 때 다시 지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나무로 지어진 건물 중 두 번째로 오래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무량수전과 석등(石燈)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무량수전 앞 중정(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안양루(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拜禮石)이 현존한다.
날아갈 듯 치켜올라간 지붕
멋스러운 문과 벽 그리고 건물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중간 부분을 약간 불룩하게 만든 ‘배흘림기둥’은 부석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무량수전 뒷편
무량수전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부석(浮石)
이 부석은 선묘라는 여인의 전설과 관련이 있는 부석(浮石)
선묘는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의상대사를 몹시 사모하였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선묘는 의상대사가 신라로 돌아가자 의상대사를 잊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이 자리를 차지한 도적들 때문에 절을 짓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때 선묘룡이 나타나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 때의 바위가 무량수전 뒤쪽에 내려앉았다고 하는데 이 바위가 '부석’이라는 바위이다. 선묘룡은 무량수전 앞 석등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1967년 5월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설화를 쥣받침하는 5m가량의 석룡하반부를 발굴한 바 있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에 서 있어 궁금중을 자아낸다. 아마도 동쪽 을 향해 안치된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방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부석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 기단폭 이 3.56m 이다.
삼층석탑과 무량수전 사이로 선묘각이 보인다.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삼층석탑 앞 풍경
조사당 가는 길
삼층석탑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약간?의 갈등을 했지만 다녀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또 다른 멋이 숨겨져 있는 조사당과 자인당도 꼭 들려봤으면 한다.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으며 정면 3칸 ‚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 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대사의 상(像)을 안치하고 있다.
선비화(禪扉花)
조사당의 처마 밑에는 선비화(禪扉花)라 불리는 골담초가 있다. '택리지'에는 신라의 의상 대사(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처마 밑에 있어 비와 이슬을 맞지 않으면서 천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철조망은 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찾아 본 내용에는 문화재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었다. 바로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답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조사당을 순례하면 여러분과 나를 슬프게 하는 또 하나의 20세기 구조물을 만난다. 그것은 조사당 정면 반쪽을 닭장 치듯 철조망으로 둘러친 것이다. 의상대사가 심었다는 골담초(骨擔草)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골담초는 선비화라는 것으로 그늘에서 저절로 자란 것이겠지만 그것을 의상대사의 전설로 끌어 붙인 것이다. 그 잎을 다려 먹으면 애기를 갖는다고 한 것이다. 수난을 막아보겠다고 닭장을 친 것이나 모두 같은 과에 속하는 무리들의 작태일 뿐이다.
이 조사당 건물의 난데없는 수난 때문에 우리는 건물의 정면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는 피해만 보게 되었다.'
선비화를 보호하기 위한 닭장같은 울타리가 오히려 제대로 건물을 보지 못하는 부분을 유홍준 교수는 꼬집어 말한 듯하다.
자인당 가는 길. 조사당을 나와 200여m 더 가면 된다.
단하각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응진전(應真殿)
무량수전의 북편 윗쪽에 떨어져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자인당(慈忍堂)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했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다. 문고리가 걸려 있으나 문을 열어 석불을 볼 수 있다.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보물 제220호)
이 2구의 불상(좌,우)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자인당 석불좌상 (중앙)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자인당에서 내려와 삼성각으로 향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무량수전 뒷편 왼쪽에 있는 석불. 만든 지 얼마되지 않은 듯..
삼성각 가는 길
삼성각(三聖閣)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는 삼성각 문살
내려온 길
범종각
만세루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범종각은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굴뚝과 장독대
관음전
다시 바깥세상으로 ... 휘어진 회전문 문지방의 자연스러운 미
부석사에서의 멋진 기억을 안고 내려가는 길. 석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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