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화성행궁(華城行宮)

비사랑 2022. 3. 23. 19:14

2022년 3월 13일, 일요일 비

 

어제 수원 화성길을 돌고 시간이 부족해 화성 행궁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마음 먹은 김에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큰 기대없이 스템프북에 마침표를 찍는 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기대 이상으로 너무 멋진 곳이여서 놀랐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위치: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관람시간

하절기 (3월 ~ 10월)
동절기 (11월 ~ 2월)
09:00 ~ 18:00
휴무일 연중무휴

※ 수원화성은 개방형이며 관람시간 이후 무료 관람 및 야간 관람 가능하다.

 

요금표

구분 어른 청소년 및 군인 어린이
개인 1,500원 1,000원 700원
단체 1,200원 800원 500원

 

통합매표

수원화성, 화성행궁,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4종을 관람할 수 있는 티켓
매주 월요일은 박물관 휴무로 통합관람권 발매 불가 

(실제 어제 성곽길을 걸어보니 하루에 모두 돌아보는 건 무리일 듯 싶다..)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화성행궁 매표소

 

 

행궁(行宮)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좌익문(左翊門). 산 위에 서장대가 보인다.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힌다.

 

 

 

 

 

중약문(重鑰門). 그 옆에 스탬프 함이 있다. 어제 수원 성곽길 스탬프 투어 마지막 한 칸을 채웠다.

 

 

느티나무(槐木)

화성(華城)성역 이전부터 있던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높이 30m둘레 6m이다.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2003년부터

나무살리기 작업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소원나무' 라 불린다. 

 

 

 

중양문(中陽門)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봉수당으로 바꾼 것이다.

 

왕궝의 상징인 편전 공간과 1795년 '을묘원행 시' 진찬연 장면을 연출해 놓았다.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며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낙남헌(洛南轩)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본래 낙남헌 터에 있었으며 정조가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1794년에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를 특별히 마련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득간문(得間門)

 

 

득간문 옆 팔폭 병풍도 

 

 

 

 삼수문(三壽門)

 

 

 

장락당 지붕

 

 

 

봉수당과 장락당 뒷편의 행각. 환관과 나인의 처소인 듯..

 

 

 

 다복문(多福門)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장복문(長福門)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 부엌

 

 

 

 

유복문(維福門)

 

 

 

구여문(九如門)

 

 

 

 

 

화성행궁은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드라마 속 수라간(水剌間)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가어문(嘉魚門)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유여택 마당 한 편에 있는 뒤주. 주말과 공휴일에는 체험이 가능한데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묘하다.

 

 

 

유여택의 너른 마당

 

 

  앙부일구(仰釜日晷) 

 

 

 

빈의문 

 

 

 

 

외정리소(外整理所)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한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와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하였다.

 

 

 

기층헌(起層軒) 종묘대제에 쓰이는 악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좌익문(오른쪽)과 중양문(왼쪽) 사이 마당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 수원문화재단 

 

 

 

나가는 길 (좌익문)에서 보이는 신풍루  

 

 

 

 

비장청(裨將廳)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화성 유수는 정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서리청(書吏廳)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현재 사용중인 건물인 듯 하다.

 

 

 서리청

 

 

 

남군영(南軍營)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남군영과 북군영 건물을 짓고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집사청(執事廳)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안 쪽에서 본 신풍루 

 

 

 

수원 화성행궁 광장 표석

 

정조시대 수원행궁 앞마당은 위민정치(爲民政治)와 문화행사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광장에는 4개의 그림이 도자판(陶瓷板)으로 표현이 되어 있고 200여년전 백성과 하나되는 자리를 만든 이 곳은 다양한 문화와의 접속과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홍살문을 세워 궁궐이 더 돋보이고 멋스럽다.

 

 

 

미술관 옆 화장실 

수원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데다 외관도 비슷해 부속건물처럼 보이지만 공중 화장실이며 2020년 제22회 아름다운 화장실 대상을 받았다. 들어가 보니 대상 받을 만함.. 

 

 

화성행궁 광장의 '신풍루사미도' , 이 곳 광장에는 4개의 대형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서장대성조도', '신풍루사미도', '낙성연도', '봉수당진찬도' 이다. (화성행궁을 바라보며 왼쪽부터) 광장을 걸으면서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팔달산의 내포사와 미로한정을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수원 종로사거리의 여민각(與民閣) 종각. 화성행궁 앞 광장 길건너에 위치 

여민각은 정조대왕이 1796년 화성행궁을 건립하면서 행궁 앞 십자로(현재 종로 삼거리)에 설치됐던 종각 터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던 종각과 종을 복원해 정조대왕의 위민(爲民) 정신을 담아 여민각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장 아쉬운 점은 너무 협소한 주차공간이다.  

 

 

 

궁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름답고 산책하면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에 놀랐다. 아이들과 함께해도 훌륭한 곳인 것 같다. 복원 중인 공간이 완공되면 다시 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