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아픈 역사를 품은 아름다운 창경궁

비사랑 2026. 10. 12. 10:31

창경궁은 몇십 년 전만해도 궁궐안에 동물원이 있었고 식물원이 있었습니다. 연못에서는 배를 탔던 이 궁의 이름은 창경원이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우리 역사 훼손은 궁궐과 종묘를 이어주던 숲에 도로를 내어 잘려나가게 했습니다. 끊어졌던 공간을 다시 잇는데 무려 90년의 세월이 걸렸답니다. 다행히 복원된 숲길을 따라 창경궁을 만났습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왕이 정사를 보는 대표 궁궐이라기 보다는 주로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타기도 했고 큰 화재로 주요전각이 소실되는 등 여러차례 큰 변화를 거치며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  창경궁 관람 기본 정보

💰 관람료: 1,000

🕐  관람시간: 창경궁(일반관람) 1월~12월 / 09:00~21:00 (입장 마감 20:00)

  - 창경궁 기간별 야간개방구역 이동시간 및 대온실 내부개방 일정은 홈페이지 참조

📅 휴관: 월요일

 단, 정기휴일이 공휴일 및 대체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이 정기휴일임.

🚗 주차: 전용주차장 요금: 30분- 1,500원 /초과 10분당 500원 

⭐ 관람시간: 1~2시간( 우리는 1시간 40분 소요)

 

 

궁능유적본부 - 궁능소개>창경궁

 

궁능유적본부

궁능유적본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royal.khs.go.kr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입장

북신문을 통과하면 매표가 이루어지는데 우린 통합관람권 절취 후 입장한다.

 

 

종묘에서 북신문을 통해 입장했지만, 글의 순서는 창경궁 정문부터 올립니다.

 

홍화문 (弘化門)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옥천교 (玉川橋)와 명정문( 明政門))

옥천교(玉川橋)는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옥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명정문(明政門)및 행각(行閣) - 보물 제385호  

 

 

 

서회랑에서 바라본 명전전과 동쪽 회랑

 

 

 

명정전(국보 제226호)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명전전 계단에는 쌍룡대신 봉황이 새겨져 있다.  

 

 

어좌와 일월오봉도( 日月五峯圖)

 

 명전전 천장은 전체가 우물정(井) 형태로 되어 있고 단청이 화려하다. 건물 중앙 천장에는 봉황을 볼 수 있는데 길상문양의 봉황은 정전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길상문양이란 각 문양요소를 따로 제작해 천장에 함께 매단 수법이다.) 봉황의 의미는 태평성대로 이를 통해 현 왕조시대가 태평성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 문정전 오른쪽 명정전 사이의 회랑

 

숭문당(崇文堂)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문정전(文政殿) -  행사 준비로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이곳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게 된 곳으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보양문(寶陽門)

   외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주목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는 말대로 천년을 훌쩍 넘겨살고 주은 다음에도 천년이 넘도록 석지 않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주목은 18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023년 고사하였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방부처리 과정을 거쳐 여기에 서 있다.

 

 

함인정(涵仁亭)

함인정(涵仁亭)은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 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서 이곳에서 공연 등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담 너머 건물은 '창덕궁 취운정'이다. 

 

향나무

 향나무는 궁궐이나 능주면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향나무는 19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전되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도 그려져 있다. 자태가 너무 멋지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景春殿)은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숙종 두 번째 왕비), 헌경황후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 공간으로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환경전(歡慶殿)  

환경전(歡慶殿)은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 건물로 보인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보인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복헌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집복헌은 궁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양화당(養和堂)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통명전(通明殿)은 왕비의 침전이며 내전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다. 통명전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 용마루가 없는 유일한 건물이다.

 

연못

통명전 서쪽 마당에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다. 물의 발원지는 연못 위쪽에 있는  돌샘으로 이 물이 돌로 만든 직선 물길을 따라 흐르다 연못으로 떨어진다.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궁궐 여인들의 답답하고 무료한 생활을 배려하여 만든 아름다운 공간인 셈이다. 통명전 연못 위쪽 높은 언덕 담장에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이 있다. 

돌샘( 洌泉 )과 물길

 

 

춘당지 가는 길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가면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 가는 길이다. 우리는 춘당지 일원을 보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창덕궁으로 가기로 한다.

 

 

창경궁 일원과 남산이 내려다 보인다.

 

 

풍기대 (風旗臺) 보물 제 846호

조선시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석조 기상 관측 기구로 풍기(風旗)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깃발이며 풍기대(風旗臺)는 풍기를 세웠던 받침대이다. 깃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24방위 기준의 풍향을 읽고, 깃발이 날리는 각도와 펄럭이는 소리의 강도로 바람의 세기를 관측했다.

 

 

앙부일구( 仰釜日晷) 해시계 

15세기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만든 해시계는 현존하지 않고 어디에 설치됐다는 기록만 있다고 한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 이천(李蕆), 이순지(李純之) 등이 왕명에 따라 처음 만들었으며, 그 해 10월 종묘 앞과 혜정교(惠政橋, 현 서울 종로에 설치되었던 다리)에 각 1대씩 설치하였고,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궁궐과 관공서에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궁마다 앙부일구가 설치되어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성종태실과 태실비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1928년 즈음에 조선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당지(春塘池) 일원

춘당지(春塘池)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원래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후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하였다.

 

대춘당지(大春塘池)

 

춘당지 섬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层石塔) 보물

탑의 기단부는 사각형 받침돌과 8면에 안상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을 새긴 연화대좌로 구성되었다. 7층의 탑신부는 기와지붕건물 모양이며 꼭대기에는 흰 돌로 만든 보주 장식을 올렸다. 1층 몸돌에 새겨진 성화(成化)6년이란 글씨를 근거로 1470년 조선 성종때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소춘당지(小春塘池)

 

 

대온실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배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면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건립하였다. 근대건축과 제국주의 문화 침탈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시설이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궁궐 산책하기에 너무 멋진 길이다.

 

 

 

 

창덕궁 가는 길 

 

 

함양문

이 문을 지나면 '창덕궁 후원' 입구이다.

 

 

한때 동물들과 식물들이 궁을 차지하고 놀이와 유희의 공간으로 전락되었던 아픈 역사를 지닌 창경궁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멋진 궁이였습니다. 관람객이 있었지만 시끄럽지 않았고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은 자연이 함께여서 번잡했던 경복궁과는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궁은 나름대로의 색깔과 특별함을 지니고 있지만, 창경궁은 자연의 색깔, 편안한 음악이 떠오르는 곳이였습니다. 창덕궁은 어떤 색깔일지 궁금함을 안고 발길을 옮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