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다녀온 진주성입니다. 늦은 포스팅 올려봅니다.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은 진주시에 있는 고려 후기에 개축된 석축 성곽이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호국의 성지이며 촉석성(矗石城), 진주읍성이라고도 불린다. 1592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이 있었고 1593년 2차 전투 때 성이 함락되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현장이다.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성으로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국방사 연구에도 중요하다. 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복원 정비된 것이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 공영주차장
◎ 주소: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 055-749-5171
🕗 운영시간: 하절기(3월~10월) 05:00 ~ 23:00, 동절기(11월~2월) 05:00 ~ 22:00
입장시간 09:00 ~ 18:00 (그 외 시간 무료 개방)
◎ 입장료 : 성인 2,000원 / 청소년 · 군인 1,000원 / 어린이 600원
◎ 기타 안내 사항
- 휠체어, 유모차 대여- 공북문 매표소, 호국마루 관광안내소
※ 대여 시, 신분증 지참 필요
- 성 내 킥보드 등의 전동기구와 자전거 사용 금지
- 반려동물 입장 금지

진주성 공북문 매표소

매표소 맞은편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다.
공북문(珙北門)

원래 내성의 북쪽 성문으로, 공북문이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임금을 향하여 두손 맞잡고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2층 누각으로 된 문루이고, 현재 진주성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공북문 천장화와 성안쪽에서의 모습
중영(中營)

조선시대 무관인 우후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우후는 각 지방의 군대를 관리하는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무관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이자 절도사 다음으로 막중한 입무를 지닌다. 따라서 진주성 중영은 경상우도 병무와 방어의 중점 기지로서 진주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중영 중심공간인 정당 복원은 일제강점기 이후 무분별하게 훼손된 진주성의 본 모습을 되찾고 역사문화도시인 진주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진주성 석굴(石窟)

현존하는 2개소의 석굴은 암반을 뚫어 만든 인공 동굴이다. 우측(북쪽)에 위치하는 석굴은 1980년대 진주성 정화사업 이전까지 중영 터 일원에 소재한 진주세무서의 연탄 및 갈탄 저장소로 활용되었다. 좌측(남쪽) 석굴은 진주세무서 운영 시 조성한 축대로 인해 입구가 막혀있었으나, 2022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석굴의 내부 벽면에는 암반을 뚫은 천공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근현대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석굴의 바닥면은 평탄하게 조성하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일기 쉽게 만화로 그려진 진주대첩 이야기
충무공 김시민(忠武公 金時敏, 1554~1592)장군 동상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자 육지의 이순신에 가장 근접했던 장수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왜군의 침입 경로를 봉쇄하고 큰 전사자를 내며 패퇴시켰다. 김시민의 활약 덕분에 이순신은 해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왜군들은 보급에 직격타를 맞아 큰 손실을 입었다. 그야말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구국(救國)의 영웅이다. 사후 그의 충정과 공로를 기려 이순신과 동일하게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문
기상은 예리하면서도 강했고 자질은 굳세면서도 온화했네
의리로써 줄기를 삼고 충성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온전히하고 적을 물리친 것은 누구의공적이 이와 같겠는가
나라 일에목숨 바친것은 누구의 충성이 이와 같겠는가
비봉산이 높고 높으며 남강 물이넘실거리니
비석 하나 영원히 전해져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리
영남포정사 문루( 嶺南布政司 門樓)

이 문루는 조선 시대 말엽에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아인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처음 세웠다. 그 뒤 전국의 행정 체계가 변함에 따라 고종 32년(18905)에는 진주관찰 부의 관문이 되었고, 고종 33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정문으로 사용되며 영남포정사 문루라 불렸다.
하마비(下馬碑)와 망미루 (望美樓)


하마비는 수령이하는 말에서 내려 들어가라는 표석,
문루의 편액인 망미루라는 글씨는 지중추부사 서영 보가 썼다. 미는 미인의 준말로, 임금을 뜻하므로 망미루' 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진주성 비석군

조선조 선조 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 10년(1656) 목사 성이성의청덕유애비 등조선시대에 세워진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 이 곳에서 동북문으로 가서 성곽을 걷기로 한다. 정해진 코스가 없으므로 성곽을 걷다가 건물이나 유적을 보고 다시 걸었다.

중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성의 쪽문인 듯하다. 걷다 보면 2개 정도가 더 있다.
용다리

지금의 동성동 212-1번지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이루지 못한 아씨와 머슴 돌쇠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상사병으로 죽은 아씨와 돌쇠가 목메 죽은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번 왔다 갔다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 라도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6.25 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이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있다.

북장대( 北將臺)

북장대는 진주성 북쪽의 지휘 장대이다. 장대는 군대를 지휘 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말한다. 광해군 10년 (1618)에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고쳐 짓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은 진주성 북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어서 성의 안팎을 한 눈에 살피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군사 건물로서 후대 군사 건물의 모범이 되었다.
진남루(鎭南樓)

마루 아래 기둥은 돌로 낮게 세웠고 누각은 난간을 둘렀으며 군사 건물의 특성상 지붕을 낮게 설치하였다. 북장대의 누각 이름은 진남루이다.


누각 천정에는 용의 기상이 느껴진다.

진주성의 역사를 말해주는 엄청난 크기의 팽나무
경절사 (景節祠)
고려의 충신 하공진 장군의 절개를 기리는 사당으로 영정과 위폐를 봉안하고 향례(享禮)를 받드는 곳이다.

외삼문은 경앙문(景仰門)
충의당(忠義堂)과 수덕제(修悳濟)


경절사 안에는 동쪽에 수덕재, 맞은편에 충의당이 마주보고 있다.
열일문(烈日門)

내삼문인 열일문. 하공진 장군의 위폐를 모시는 곳


거란 침입 당시 끝까지 나라를 지켜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청계서원 (淸溪書院)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1364)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에 기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晋陽君)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외삼문에는 창제문(蹌濟門) 현판이 걸려 있다.

정교당(正敎堂)과 청계서원(淸溪書院)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


진주박물관 내려가는 길

국립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이곳은 따로 글을 올리기로 한다.
성화 안치대

88서울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전국 성화봉송행사 기간중 진주시 방문때 성화 안치를 위해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설치하여 기증한 시설물로 지금은 매년 개최되는 개천예술제 행사 중 성화 안치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과 너무 잘 어울리게 지은 화장실
★ 다시 성곽길로 간다.

고려 말 우왕 5년(1379)에 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서로 합쳐져 있는 진주성 사랑나무 (연리근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나무가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나무의몸통이 만나면 연리목)라 하며 두 몸이하나가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사랑, 부부의사랑, 연인의사랑에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 로 불린다. 연리나무 앞에서 기도하면 사랑의소원이 성취되고, 마음속의바라는 소망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진주성 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

진주성은 1979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정화 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창렬사( 彰烈祠 ) 측문

창렬사(彰烈祠)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년)에 건립된 사액 사당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현재 창렬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와 삼장사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39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사액: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


진주성 호국나무


진주성의 수호목으로 600년 이상된 나무였는데, 2019년 6월 18일 태풍에 쓰러졌다고 한다. 느티나무 자리에는 느린 우체통이 세워졌고 쓰러진 나무는 진양호 우드랜드에 전시되고 있다. 파손된 조각은 진주 반닫이, 소목장으로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호국나무: 수종은 느티나무로서 밑동둘레 5.2미터, 가슴둘레 4미터, 높이20미터
호국사(護國寺)

진주 호국사(護國寺)는 진주성안에 위치한 사찰로 나라를 지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 산성사(山城寺)였습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승병(僧兵)을 양성하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을 때 함께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숙종때 순국한 승병들의 충절을 기리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호국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고 전한다. 사찰은 고려 말 이후 계속 존재했지만 현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거나 근래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진주성 서문

진주성에는 촉석문, 동북문, 서문이 있다.

살짝 오르막 계단
호국사 전경

서장대에 오르길에 호국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진주성 서쪽의 지휘 장대이다. 장대는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말한다. '여지도서' 에는 '누의 이름은 회룡루이고 다락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건물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1934년 진주의 서상필이 다시 지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진주 남강, 천수교와 음악분수대

서장대에서 보는 진주 시가지



진주 운석빵 카페


진주성 쪽문
3.1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 내 각체에서는 대규모 군중이 집결하여 3.1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3∙1독립운동 기념비는 이를 기념하고, 순국선열 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1년 3월 1일 진주시민들이 결의하여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에 걸쳐 전개된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시위는 기생ㆍ걸인들까지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전민족적 성격의 시위였다. 진주장날을 이용하여 진주뿐 아니라 서부경남 각지의 민중이 함께 항거하였다는 점에서 경남의 대표적 만세시위라 하겠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04년에 3.1독립운동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저정하였다.
진주지구 전승비

진주지구 전승비는 미 제25사단 `칸'기동부대가 진주 지구에 처들어 온 북한군 제6사단과 9사단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1958년 7월 10일 건립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진주지구 전승비를 기념하여 2004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진주성카페

카페를 이용하지 않아도 사용 가능한 화장실이 있다.




진주성은 남강과 함께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가을에 특히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촉석루와 의암


정원의 나무들이 꽤나 멋스럽다.
진주성 우물
이 우물은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우물로서 2013년 9월에 복원되었다 우물의 너비는 1.5m쯤이고 깊이는 8.4m인데 더러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둥근 모양의 둘레돌을 주변에 놓았다.


조선 후기 진주성에는 지금 위치에 관청과 함께 세 곳에 우물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진주성을 쌓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우물로,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에는 식수 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 쌍충사적비(晉州 雙忠事蹟碑)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제말)과 그의 조카 제홍록 째의 공적을 함께 새긴 비석이다. 한 집안의 두 충신 이라는 뜻에서 쌍충(雙忠) 이라고 하였다. 정조 16년(1792)에 촉석루 옆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헐리어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1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서유린이 글을 짓고 이병모가 글씨를 썼으며 조윤형이 비문의 제목인 두전(頭篆)을 썼다.
촉석문(矗石門)


1972년에 복원된 진주성의 동문이다.

잠깐 나가서 찍은 사진
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겨울이라 발은 좀 시려웠다.^^
남장대(南將臺) 현판

너른 마루는 풍류를 즐기기에 좋을 듯하다.
영남제일형승( 嶺南第一形勝 )이라 적은 편액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으로는 평양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1416)의 『촉석루기 (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의기사 (義妓祠)

외문인 지수문(指水門)
의기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대첩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수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 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과 다산 정약용의 기문이 걸려 있다. 논개의 영정은 처음에는 김은호의 작품이 모셔져 있었 으나 화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2007년 표준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의암 가는 길

촉석루 앞, 성벽 아래 의암 내려가는 문이 있다.



의암사적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의 의암에서 외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의암(義巖)

의암 바위 옆에 새겨진 '의암'이라는 글씨는 정문부의 유언에 따라 그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전서체로 쓴 글씨인데 남강에 물이 찼을 때는 안보이다가 물이 빠지면 보인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晋州城 壬辰大捷 癸已殉義壇)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6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 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r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그들의 역사 정신을 가슴 깊이 이어 받고자 이 단을 세운다.


꽤 넓은 광장이다. 종각이 있다.

김시민 전공비

김시민 전공비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사망한 김시민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선조 25년(592)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과 의병, 백성들이 힘을 합쳐 3,800명의 군사로 2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진주성을 온전히 지킨 과정을 기록 해 놓았다.
진주 촉석 정충단비

정충단비는 선조 26년 015%9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인물들의 충절과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충단은 진주성의 함락과 함께 순국한김천일 등 여러 장수와 병사, 백성 등 7만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으로 비석에는 그들의 장렬한 행적이 새겨져 있다.


성 한바퀴의 끝 공북문이 보인다.

공북문 측면
진주성을 돌아보는데 1시간 40분 정도 소요 되었다. (진주박물관 관람시간 제외)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주성을 둘어보는 동안 아름다운 남강의 풍경과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순한 관광 코스가 아닌 전통과 이색적인 모습에서 힐링의 시간을 가질수 있는 진주성을 추천드린다. 오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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